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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학이론

한국 관광의 발달사_조선시대~해방

by 슈퍼초이 2022. 10. 25.

관광학 기초 이론 2

제 2절 한국 관광의 발달사

 

3.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여행은 이전의 삼국, 고려시대와 흡사하였다. 조선시대는 유교를 숭상하는 계급사회로서 양반, 중인, 상민, 천민 등 네 계층의 봉 전적 신분제도로 엄격히 구분되었고, 양반인 사대부는 시와 풍류를 즐기면서 학문적 교양의 확대를 위해 단체여행에 참여하였다. 또 점차로 평민 계층의 여행과 여가 활동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여행자의 숙식을 해결하는 숙박 형태는 완전히 관용으로 출장 가는 관원들을 위한 관용여권인 역과 반관반민의 성격으로 평민이 관리하고 관용 여행자의 숙식 외에 일반 민중이 이용하는 여사 그리고 빈자에게 음식, 여행자에게 약을 무료로 제공하였던 원 제도가 발달하였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 후 객상을 숙박시켰던 객주와 여상을 숙박시켰던 여각 그리고 주막이 등장하여 그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의 객주나 여각은 주로 상인을 대상으로 한 여관이었고, 주막은 임진왜란 때부터 성행하여 주로 시골의 길거리에서 술과 음식을 팔고 나그네가 쉬는 여관의 성격을 띠고 있던 대중적인 숙박 형태였다


교통수단은 조선 초기에는 소나 말을 이용한 우마차, 유선 등에 불과하여 많은 사람이 여행에 참여하거나 이용하지 못하였고 매우 부족한 설정이었다.

4. 19세기 말
우리나라 관광의 본격적인 출발은 19세기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말기 발발한 운양호사건으로 인해 문호개방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1876년에 일본과의 강화조약, 병자수호조약 체결을 계기로 부산항, 원산항 및 인천항이 개항되고 많은 해외 열강과의 통상과 접촉을 통하여 기존의 전통적인 여행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개항과 더불어 외국과의 교역을 통한 경제적 침투와 함께 외국인이 입국하면서 기존의 숙박시설의 모습이 변화하였고 근대적 여관이 서울, 인천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생겨났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근대적 호텔은 인천의 대불호텔이라 전해지고 있다. 3층으로 양식시설을 갖춘 이 건물은 일본인 소리 료쿠타로우가 1887년 착공하여 1888년에 완성한 호텔이다.

그리고 그 당시 영업이 번창하는 것을 본 청국인 이태라는 사람은 대불호텔 바로 길 건너에 있는 2층 건물의 아래층에 서양 잡화상을 하면서 2층에 스테워드호텔을 개업하였다.


서울의 최초의 서양식 숙박시설은 구한말 서울 정동에 세워진 손탁호텔이었다. 1902년 10월에 개업한 손탁호텔은 위층은 귀빈들의 객실로 사용하였고 아래층은 보통 객실과 식당으로 사용하였다. 1909년에는 프랑스 여인이 고종황제로부터 하사받은 하남 호텔을 이화여고 정문 앞에 세웠다.


서양식 숙박시설들은 처음에는 인천, 부산과 같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발생하였는데 철도교통의 발달로 전국의 주요 철도역 부근을 중심으로 번창해 갔다. 이에 따라 개항 무렵에 흔히 볼 수 있었던 행랑과 짚신 신은 괴나리봇짐의 나그네 그리고 보통 여염집과 다름없는 초가지붕의 여인숙의 전경은 교통과 도시의 발달로 인하여 점점 근대적인 관광사업 형태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5. 일제시대
일본의 통치는 우리나라 관광산업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철도가 일본의 대륙침략목적으로 부설되었고 철도여행이 주를 이루게 뒤에 따라 1912년 부산과 신의주에 최초의 철도 호텔이 세워졌고, 1914년 서울에 조선호텔, 1915년 금강산에 금강산호텔, 장안사호텔이 각각 세워졌다. 그 후 1925년에는 평양철도 호텔, 1938년에 당시 최대규모를 자랑하던 서울의 반도 호텔이 장안의 화제를 모으면서 개업하였다.

한편 일본은 노일전쟁의 승리로 인하여 대륙 진출이 활발해지자 1914년에 재팬 투어리스트 뷰로의 한국지사를 개설하여 관광사업 및 국제경제상의 중요성을 알리고 일제강점시대동안 일본인의 여행 편의를 돌보게 되었다.
이때는 참으로 암울하였다. 모든 관광시설은 일본인과 외국인을 위한 것이었고 우리 국민은 여행이 극도로 제한되었으며 관광사업 역시 일본인이 독점하고 있어 민족자본이 형성되지 못한 치욕의 시기였다.

6. 해방 후부터 1960년까지
해방이 되고 1948년 우리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우리의 관광사업은 걸음마 단계에 있었다. 1948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최초의 외국인관광단이 2박 3일의 일정으로 경주를 비롯하여 국내 주요 관광지를 여행하였다. 같은 해 서울과 온양온천 간 관광 전세버스 운행면허가 처음 발급되었고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사와 팬 아메리칸 항공사 등의 서울영업소가 조선호텔에 사무실을 차리고 영업을 개시하였다. 뒤이어 1950년에는 온양, 대구, 설악산, 서귀포, 무등산, 해운대 등지에 교통부 직영 관광호텔이 개업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곧 문을 닫았다.

그 후 전쟁에서 피해를 받지 않은 호텔들은 한국에 파병된 UN의 휴가를 위한 휴식과 위안 장소로 사용되었다. 또한 한국의 풍광을 영화로 소개하는 정도의 것이었으나 2박 3일의 카메라 여행을 조직하는 등 차츰 활기를 띠어갔다. 또한 UN군의 휴가 장병이 일본이나 홍콩 등지에서 지내는 휴가를 한국에서 지낼 수 있게 하는 R&R 지구로의 지정이 필요하였으나 UN군 당국에 의해 시설의 미비, 보안 문제 이유로 제외되었다가 1960년에 이르러 지정이 결실을 보았다.

제도적으로는 1953년 근로기준법이 제정, 공포되어 모든 근로자에게 연간 12일의 유급휴가를 보장하는 법적 뒷받침이 만들어졌고 1954년 2월 17일 교통부 육운국에 관광과가 설치됨으로써 처음으로 한국 관광을 육성, 지도하는 기능을 수행하여 한국 관광이 처음으로 산실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958년도에는 온양, 해운대, 불국사 등에 철도 호텔을 개업하게 되었으며 관광 직행열차 및 관광버스 등도 운행하기 시작하였고, 이 무렵부터 관광에 대한 출입국 절차의 간소화, 국내외에 걸친 관광 선진 등 관광 행정 본연의 사무가 미미하게나마 실천에 옮겨지게 되었다. 또한 1958년에는 대통령령 제1850호에 따라 중앙에는 교통부 장관 자문기관으로 중앙관광위원회, 지방에는 도지사의 자문기관으로 지방 관광위원회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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